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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봉선과 노랑물봉선
ⓒ 이규현
물봉선의 생김새는 약간 특이하다. 꽃의 화관이나 꽃받침이 시작되는 곳에 툭 튀어 나온 부분인 거(距)가 물봉선은 돌돌 말렸다. 봉황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봉선이라던가! 꽃들의 이 부분은 텅 비었거나 '꿀샘'이 있어서 '꿀주머니'로도 불린다. 물봉선은 이곳에 꿀샘이 있다. <꽃과 곤충>의 저자 '다나카 하지메'는 어느 날 물봉선의 꿀주머니에 주둥이를 대고 꿀을 먹고 있는 '땅벌'을 보게 된다.

땅벌이 꿀을 훔쳐 먹었을까? 하지만 길게 찢긴 상처는 땅벌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컸다. 그럼 몸집이 큰 호박벌? 오후 5시. 꽃 주변을 날고 있는 수많은 곤충 중에 호박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수많은 물봉선 중 절반 가까이에 똑같은 상처가 나 있었다.

"다시 그 저습지를 찾아갔다. 과연 어리호박벌이 와 있었다. 몸이 2cm이상 되는 커다란 벌이 잽싸게 날아와 꽃에 걸터앉더니 검고 날카로운 주둥이 끝을 꿀주머니에 찔러 넣었다가 1~2초 뒤 다른 꽃으로 날아가 같은 짓을 거듭했다. 꿀주머니에는 지난주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자국이 신선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 땅벌은 어리 호박벌이 뚫어 놓은 자국을 잠깐 이용한 것이다" - 다나카 하지메

꽃과 곤충, 사이좋은 친구 사이일까?

▲ <꽃과 곤충>겉그림
ⓒ 지오북
우리들은 흔히 꽃과 곤충을 사이좋은 공생의 관계로 알고 있다. '곤충은 꽃가루나 꿀을 꽃으로부터 얻는 대가로 몸에 꽃가루를 묻혀 다른 꽃에 묻혀줌으로써 수정을 돕는다'처럼. 그러나 물봉선과 어리 호박벌의 관계는 이런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어리호박벌은 꿀만 훔칠 뿐 물봉선의 수정을 돕지 않으니 꽃으로선 수정을 위하여 곤충들을 꼬드길 무기인 꿀만 속수무책으로 빼앗기는 것이다.

그런데 물봉선의 꿀을 훔치는 것은 어리호박벌만이 아니다. '삽포로뒤영벌' 역시 물봉선의 꿀주머니에 1mm정도의 작은 구멍을 내고 꿀을 훔친다. 하지만 삽포로뒤영벌의 사촌쯤인 '몸노랑뒤영벌'이나 '황토색뒤영벌'은 꿀을 훔치지 않고 꽃잎에 앉아 꿀을 얻으면서 수술과 암술을 건드려 물봉선의 수정을 돕는다.

삽포로뒤영벌은 이미 나 있는 구멍을 이용할 때가 많다. 다른 꿀벌이나 '밤나방'도 이 구멍을 통해 꿀을 훔친다. 어쨌거나 꽃은 이 경우 주변에 곤충이 아무리 많아도 제공하는 꿀(?)에 비해 실속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물봉선은 돌돌 말린 꿀주머니를 특별히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 그 안에 꿀을 둔다. 대부분의 생물들은 유리한쪽으로 진화하는데 물봉선은 왜 끝까지 이 방식을 택하고 있는 걸까?

물봉선의 비밀을 알기 위해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자. 꽃들도 수정은 돕지 않고 꿀만 도둑질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 즉 물봉선의 꿀주머니에 해당하는 부분인 화관을 두껍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어리호박벌과 같은 곤충들이 뚫지 못하게 한다. 봄이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명자나무와 석류나무의 꽃이 그 대표적이랄 수 있다.

명자나무와 석류나무는 둘 다 꽃가루받이를 새에게 의존하는데 꿀을 담은 꿀통부분은 두껍고 단단하다. 그래서 뚫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단한 통을 만들려면 자원이 많이 필요하니 어찌 보면 자원낭비다. 하지만 석류나 명자나무의 생태를 돌아보면 자원낭비랄 수 없다. 꽃이 다 핀 뒤에도 맺은 열매를 지켜주는 벽이 되기 때문이다.

명자나무는 지루하도록 꽃을 오래 피운다. 하지만 물봉선은 겨우 이틀정도만 꽃을 피울 뿐, 그 후에는 꽃잎을 버린다. 따라서 물봉선은, 단기적인 이용을 위해 튼튼한 벽을 만드느니 차라리 꿀을 빼앗기는 것이 낫다는 계산을 하고 꿀주머니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혹 아는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물봉선은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지!

그런데 곤충과 무모하고도 치열한 경쟁을 하는 식물도 있다. '마다가스카르섬'에 사는 난초과 '세퀴페달라풍란'이 그렇다. 이 꽃의 꿀주머니는 자그마치 25~30cm. 이 꽃을 발견한 진화론자 '다윈'은 "틀림없이 주둥이가 30cm나 있는 곤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윈의 말대로 40년 후 주둥이가 30cm나 되는 '긴입갈색박각시'가 발견되었다. 30cm가 넘는 긴 관과 그에 걸맞은 긴 주둥이를 준비하려면 영양이나 에너지가 그만큼 더 필요하다. 피차 손해다. 그런데도 난과 박각시는 왜 그렇게 무모한 진화를 했을까? 이 둘은 꽃과 곤충이 늘 서로 도우려고만 하는 관계만은 아님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30cm나 되는 관을 가진 꽃이나 이에 걸맞은 긴 주둥이를 가진 곤충은 전 세계에 많을 것 같지만 그리 흔치 않다. 아무리 봐도 멍청하니까! 어쨌거나 이 둘도 처음에는 짧은 관과 주둥이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무언가를 의도하고 조금 더 길게 발달, 불편해진 상대편은 조금 더 길게 진화하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30cm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다른 생물들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라고 외면한 방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런 손해 보는 무모한 생존의 방식을 선택한 걸까?

서로 속고 속이는 '꽃과 곤충'의 발칙하고 은밀한 세계

@BRI@<꽃과 곤충>은 이처럼 '꽃과 곤충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호기심, 탐구와 관찰로 가득하다. 수많은 생태계 이야기 중 꽃과 곤충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서로 공생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꽃과 곤충이 이렇게 치열하게 서로를 속이고 속고 있다니!

40년 넘게 꽃과 곤충을 관찰해오고 있는 저자 '다나카 하지메'는 생태분야의 유명한 권위자로 세계 유명 과학지인 <네이처>에 자신이 관찰하여 얻어진 생태관련 새로운 사실들을 계속 발표중이다. 일본 내 생태관련 잡지나 신문 등에도 기고, 자문역할도 한다.

이 책은 이런 저자가 오랫동안 일본 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관찰한 내용을 번역 출간한 것으로 꽃이나 곤충의 사진도 풍성하고 꼭지마다 관련 삽화를 실어서 이해가 쉽다. 저자의 또 다른 책에는 <꽃과 곤충이 만드는 자연> <꽃에 감추어진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꽃의 얼굴> 등이 있다.

"<꽃과 곤충>은 식물과 곤충을 따로 다루어 오던 한계에서 벗어나 진화의 관점에서 식물과 곤충의 공생관계에 대해 관찰한 결과를 담은 책이다. 특히 꽃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곤충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해낸 지은이의 생물지식은 일반인들이 자연생태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추천사, 변봉규 박사(국립수목원)

다나카 하지메가 들려주는 꽃과 곤충의 세계는 발칙하고 은밀하다. 한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식물들은 한밤중에 교묘한 전략을 세워 곤충들을 유도하여 수정을 함으로써 또 다른 식물경쟁자들을 따돌리는가 하면, 번식에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동물과 곤충들을 온갖 방법으로 선택, 이용한다.

곤충과 싸움을 벌이는 꽃도 있고 곤충을 속이거나 따돌리는 꽃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버섯냄새를 풍김으로써 버섯파리를 꼬드기는 '다마족도리풀'이나 곤충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썩은 고기냄새'를 풍기는 '스타펠리아'의 변신은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 현명해보이기까지 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꽃들의 세계와 곤충들이다.

아름다운 공생관계로만 알고 있던 꽃과 곤충의 서로 속고 속이는 발칙하고 은밀한 이야기는 앞으로 꽃 주변에 더 많이 머물 듯하며,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꽃과 곤충을 새롭게 보게 하고 더욱 깊게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많은 꽃이 앞 다퉈 피는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책에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은 꽃들과 곤충들을 만나 눈여겨 관찰해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꽃과 곤충>-다나카 하지메 지음/쇼자 아키코 그림/이규원 옮김/지오북.2007년 2월/1만 6천원)이 책은 국립수목원 연구관인 이유미 박사님과 국립수목원 연구사인 변봉규 박사님이 감수, 우리땅에 맞는 관련 생태정보를 덧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꽃과 곤충 -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

다나카 하지메 지음, 쇼자 아키코 그림, 이규원 옮김, 이유미. 변봉규 감수, 지오북(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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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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