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악부, 유배지에서 영남을 노래하다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 |
  • 입력 2022-12-30 08:06  |  수정 2022-12-30 08:56  |  발행일 2022-12-30 제35면

1
김해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릉. 이학규는 김해읍성 언저리에서 24년을 귀양살이하면서 김해지방의 풍물과 토속을 노래한 30수의 악부시 금관죽지사, 77수의 연작시 금관기속시를 지었다. 〈김해시청 제공〉

역사에는 자랑스러운 것과 안타까운 것들이 뒤섞여 있다. 안타까우면서 마음이 저리는 것 중 하나가 귀양살이 이야기다. 귀양은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별로 대단치 않는 일에도 선비의 일생을 가두고 닫았다. 선비는 살기 위해 글을 지었고 역사가 그 글을 받아들였다. '유배문학'이다.

노론에 내쳐진 성호 이익 외손 이학규
김해읍성 언저리서 24년간 귀양살이
신라·고려 영남인물과 풍속 등 소재
음악 수반한 문학 장르 '영사악부시'
흰 박꽃 같은 글 남긴 '고전문학 보석'
다산과 학맥·집안도 얽혀 많은 영향
민초 애환 담은 한문으로 쓴 우리문학


2
낙동강 하구의 갈대밭. 이 풍광에 혹해 이학규는 낙동강 어촌을 소재로 20수 연작시 남호어가(南湖漁家)를 지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비운의 문재 낙하생 이학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이도 많이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사유로 24년을 김해에서 귀양살이한 성호 가문의 비운의 문재(文才), 낙하생 이학규(1770~1835)가 있다. 기호남인 대학자 금대 이가환이 외삼촌이고 다산 정약용을 형님처럼 따랐다. 다산과 같은 날, 같은 사유(천주학)로 귀양을 갔고 다산보다 6년 더 귀양살이했다. 수많은 글이 김해와 강진을 오갔고 주옥 같은 글을 남겼다. 역사는 그를 잊었지만 문학이 그를 불렀다. 영남을 노래했고 흰 박꽃 같은 그의 글은 고전문학의 보석이 됐다.

이학규는 성호 이익 가문의 외손이다. 성호의 조카인 외조부 이용휴에게 학문을 배워 약관의 나이에 문학으로 명성을 얻었고 정조 조정의 궁중 저술 편찬에 참가했다. 성호는 미수 허목의 학풍을 계승한 실학의 대학자로 안정복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으로 이어졌고 택리지를 쓴 이중환도 성호의 재종손이다. 하지만 성호의 형 이잠이 숙종에게 올린 노론 폐해 상소문으로 옥사한 이후 집권 노론세력의 미움을 받았다.

이학규는 정조 승하 후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에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과 함께 구금됐다. 천주교 신자가 아님이 밝혀졌으나 성호 집안이란 사유로 전라도 능주(화순)로 유배됐다가 그해 가을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자 황사영과 내외종 간이란 이유로 국문을 받고 능주에서 김해로 이배되어 24년을 귀양살이한다. 이때 다산은 장기에서 강진으로 이배돼 18년을 귀양살이 한다. 이학규는 아호를 땅에 떨어진 선비, '낙하생(落下生)'이라 했고 다산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매사에 조심하는 사람,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다.

5
초가지붕 위에 핀 박꽃. 이학규는 유배 초가에 박꽃을 심고 이를 소재로 포화옥기라는 주옥 같은 유배 수필을 지었다.

◆비탄과 절망 속에서

이학규는 유배 기간 중 저술에 전념했다. 비탄과 절망 속에서 현실주의적 민중 인식을 받아들였고 다산의 영향을 입었다. 우리나라 역사 지리 풍속 자연과학에 많은 저술을 남겼고 관리의 부정부패를 역사 속의 인물에 빗대어 통렬하게 비판했다. 유배지에서 아들, 아내, 모친의 부음을 들어야만 했고 김해에서 얻은 재혼한 아내도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그러다가 격쟁으로도 풀리지 않던 귀양이 1824년 아들 재청으로 비로소 해배돼 인천 부평으로 돌아갔다. 31세 젊은이가 55세 늙은이가 돼 돌아온 인생 신산(辛酸)은 무엇인가? 아들 집이 낯설어 다시 김해로 내려와 김해 문사와 교유를 계속했고 자하 신위, 다산과 글을 주고받다가 다산보다 한 해 먼저 66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빈한한 가세로 그의 유고는 국내외로 흩어져 많이 없어졌지만 최근 영인본 문집이 발간되면서 그에 관한 학술 논문이 활발하게 나오고 그의 글은 고교 국어영역 고전문학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4
이학규의 영남악부. 1808년에 지었으며 영남지방 인물, 풍속을 읊은 68편의 영사악부시로 필사본이며 서울대 가람문고본이다.

◆영남악부

영남악부는 1808년 이학규가 정인지의 고려사를 구해 읽고 감흥이 일어 신라·고려 시대 영남인물, 풍속, 설화를 소재로 쓴 68편의 '영사악부시(詠史樂府詩)'다. 악부란 중국 한나라 때 생긴, 음악을 수반한 문학 장르인데 점차 음악적 요소는 사라지고 민간 풍정과 세태를 노래한 민간시가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현의 소악부, 김종직의 동도악부, 심광세와 이익의 해동악부, 이광사의 동국악부 등 다수가 있다.

영남악부는 5·7언의 정형체가 아닌 3·4언부터 자유롭게 사용했고 인물도 충신열사뿐만 아니라 탐관오리를 함께 넣어 부패한 집권층을 풍자했다. 조선 후기 한문학이 민족문화로 방향 전환을 모색할 때 민족에 대한 자각과 민중인식을 악부란 형식을 빌려 창작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성호 가문의 실학적 지성이 표출된 역사 문학이다.

◆영남 인물과 설화를 노래하다

영남악부는 역사를 노래했다. 편마다 산문 서문과 운문 악부로 되어있다. 고려말 대학자 익재 이제현 편에는 '10년의 익재난고, 시사를 의론했고/ 삼관(三館)의 역사 편찬에 세월이 흘렀네/ 만년의 즐겁지 못함은 어찌 된 일인가/ 이익재는 어찌 영남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고/ 고운이 가족을 이끌고 돌아온 것은 참으로 그윽한 일'이라고 익재의 삶을 이야기하고 우리 인물로 중국에서 문명을 떨친 이제현과 최치원을 그리워하며 최치원은 경주로 돌아왔는데 이제현은 고향 경주로 귀향하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포석정 편에는 '진한 육부가 부질없이 바람 앞의 먼지 되니/ 아! 포석정, 재앙의 빌미라네/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문 앞에 한금호요 누 위엔 장려화인 것을/ 어진 사관의 한마디 말이 진실로 탄식할 만하다네'라며 신라 멸망사를 중국 남조의 고사로 회고했고 어진 사관의 한마디 말이 후대의 가슴을 저민다. 그는 무엇 때문에 유배지 초가에서 빈대에 물려가며 역사를 노래했던가?

이 밖에 신라 인물인 죽죽사, 천관녀, 김원술, 상서장, 고려의 정과정, 안회헌, 이문학, 문공의 목면, 길재. 탐관오리를 비판한 혁작령, 철문어, 황마포, 토속설화인 동경구, 영동신, 달도가 등 주옥 같은 글로 영남을 노래했다.

3
낙하생전집. 국내외로 흩어진 이학규의 유고를 모아 1985년 한국한문학연구회가 영인본으로 발간한 이학규 문집.

◆이학규와 다산 정약용

이학규는 다산보다 8세 연하이고 같은 성호 학맥에다가 집안도 얽혀있다. 이학규 부인은 다산 집안 나주정씨 출신으로 인척이며 학규는 다산을 '척장(戚長)'이라 불렀다. 신유사옥에 죽은 인물, 이승훈은 이학규의 재종숙, 다산의 매형이고, 황사영은 이학규의 고종사촌 동생, 다산의 조카사위, 이가환은 이학규의 외삼촌, 다산의 절친이다.

다산은 "성수(이학규의 자)가 금관에 있으면서 내 시에 화답한 것이 많다"고 했고 학규는 영남악부가 다산의 탐진악부를 염두에 두고 쓴 것임을 서문에서 밝혔다. 다산의 탐진농가에 화답해서 강창농가를 탐진촌요와 탐진어가에 상응하여 상동 초가와 남호어가를 전간기사에 화답하여 기경기사를 지었다.

다산이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학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번에 성수의 글을 보았다. 거기에 너의 시를 논평했는데 너의 잘못된 점을 잘 지적했더라. 유념하거라.'

또 이학규가 유배에서 풀려나 다산 본가 두물머리에 머물 때, 부채에 아들 학유가 나비 그림을 그리고 학규가 시를 짓고 다산이 해서 글씨를 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학규의 '탁옹에게 부치는 시'이다. 탁옹은 '죽순 껍질 같은 늙은이'란 의미로 다산의 별호다.

'호남 땅에 오랫동안 나그네 되었으니/ 서울 소식은 죄다 막혀버렸겠지요/ 좋은 철이라 회포도 많으시련만/ 한창때는 바깥나들이도 쉬고 계신지요/ 시 짓는 솜씨야 더욱 섬세해졌겠고/ 구레나룻도 더 성글어졌겠지요/ 마음 같아서야 당장 낙동강으로 달려가/ 조각배 편에라도 이 편지 부치고 싶답니다.'

다산과 이학규는 순조 이후 조선사에서 사라졌지만 다산 유고는 을축년 대홍수에도 현손이 고이 지켰고 구한말에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소개하는 등 당시 지식인 사회에 알려져 1934년에 여유당전서가 발간됐다. 이학규 유고는 사후 뿔뿔이 흩어져 강원도 종형 후손가(8책), 일본 천리대학(9책), 동양문고(2책), 서울대 가람문고(1책), 규장각(1책)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1985년 한국한문학연구회가 영인하여 낙하생 전집 3권으로 발간했다.

◆이학규의 문학 세계

이학규의 글은 한문으로 쓴 우리 문학이다. 모화에 젖어 당송 시문을 흉내 내고 자화자찬에 빠진 사대부의 살찐 글이 아니라 토속을 노래하고 민초의 애환을 담았기에 국역하면 그대로 우리 정서이다.

요즘 고교 국어영역에 가장 많이 나오는 '포화옥기(匏花屋記)'이다. 포화옥은 '박꽃이 피는 집'이다. "낙하생의 집은 높이가 한 길이 못 되고, 넓이도 아홉 자가 못 된다. 인사를 하려고 하면 갓이 천장에 닿고, 잠을 잘 때 무릎을 구부려야 한다. 한여름 날에 햇빛이 쏟아지면 방안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래서 둥글게 두른 담장 밑에 박 10여 개를 심었더니 넝쿨이 자라 집을 가렸다." 작가와 나그네가 주고받는 대화체 수필로 곤궁한 생활 속 깨달음을 담고 있으며 액자소설 형태를 취하고 있다.

2022123001000726900029293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또 김해와 낙동강 유역의 삶의 현장을 읊은 '금관죽지사', 초량왜관을 잠입 취재하듯 실감 나게 그려놓은 20수 연작의 '초량왜관사', 조선통신사의 해신제 누각을 노래한 '영가대', 빼어난 한문 수필 '어떤 사람에게', 농가의 작은 대나무 집 비웃지 말라며 샘물로 빚은 술은 서울 술에 견준다는 '곽서촌사', 깊어가는 가을날, 김해 앞바다 남호(南湖)에 배를 띄우려다가 낙동강 하구에 펼쳐진 갈대밭 장관에 넋을 잃고 지은 '남호어가', 유배 15년 차 죽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글에 '지금까지 분명히 기억나는 한마디 말은 병들고 가난하더라도 함께 늙어가요'란 구절에 심장이 아린다. 낙하생을 인고와 비탄의 시인, 그의 시를 은둔과 유배문학의 꽃이라 했기에 한국 대표 한시에 어김없이 나온다.

오늘날 젊은 청춘들이 그의 글을 배우고 암송하지만 강산 어디에도 그의 자취가 없다. 24년 귀양살이한 김해 자락 모퉁이에 그의 이름을 딴 유배문학관이나 도서관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문집이 빨리 국역 되어 더 많은 그의 글을 볼 수 있기를 기다린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