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문의 나라 한국, 무의 나라 일본?

2018.01.17 20:56 입력 2018.01.17 21:08 수정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얼마 전 일본의 한 신문이 설문조사를 했더니 남자 어린이 희망 1순위는 놀랍게도(!) 학자, 박사였다(한국 남자 어린이는 운동선수). 흔히 한국은 문의 나라, 일본은 무의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출판, 신문시장 규모가 말해주듯 인구비율을 감안한다 해도 독서 인구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많다. 스마트폰이 책을 초토화시킨 현재도 공공장소에서 독서하는 일본시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반 독서 말고 학문은 어떠한가. 매년 연말 노벨상 시상식 때가 되면 새삼스레 일본 학문의 저력에 놀란다. 노벨상을 누워서 떡 먹듯 받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주로 이과계통 학문에 주어지는데, 문과계통 학문의 수준은 어떨까. 아마도 사회과학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속한 분야인 역사학, 혹은 동아시아학에서는 20세기 세계 학계를 이끌어 온 것은 일본학자들이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학문수준은 세계를 압도했지만, 영어(구미어)가 아니라 주로 일본어로 작업했기 때문에, 영향력은 그 가치의 몇십 분의 일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수준은 세계 최고였으나 영향력은 간접적이었고, 때로는 묻혔다.

내가 동양사학을 배우던 대학원에서도 일본의 벽은 높았다. 그건 꼭 내가 일본을 전공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국사도 그랬다. 대학원 끝 무렵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았던 중국사 교수님이 수업 중에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 도쿄대학에 콤플렉스를 느낄 때는…”이라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난다. 그 뒷얘기는 뇌리에서 사라졌지만 그 단락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그때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물론 그건 중국사의, 혹은 그 특출난 분의 독립선언일 뿐이었겠지만. 그동안 영어권의 동아시아사 연구도 약진했고, 무엇보다 중국인의 연구가 대국굴기의 형세다. 한국의 연구도 많이 발전했다. 반면 일본의 중국사나 일본사 연구는 예전 같지는 않다. 그래도 마치 일본 제조업이 여전히 단단한 것처럼 일본학문은 여전히 단단하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내가 이번 글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사무라이 나라, 무의 나라 일본이 어쩌다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의 국가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 연원을 찾으려면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퇴계가 고봉 기대승과 수준 높은 철학적 논쟁을 벌이고 있던 시대에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무장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전국시대). 서원이나 향교, 과거나 상서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있는 것은 오로지 근육과 칼, 힘과 전투뿐이었다. 과연 양국은 문의 나라, 무의 나라라고 불릴 만했다.

그런데 끝날 거 같지 않던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전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사무라이는 대기상태였다. 칼도 허리춤에 차고 군대도 유지한 채 이게 그대로 행정조직이 되었다. 군주인 쇼군(將軍)은 이름 그대로 최고사령관이었고, 이하 사무라이들은 계급별로 신분이 고정된 채 자신의 직무를 세습하며 수행했다(가업).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쟁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던 거다. 조만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태평시대로 접어들었다.

1600년경 1200만명 정도였던 인구는 1720년경 3000만명을 가볍게 넘었고(조선은 1000만명 정도), 얼마 안 있어 에도 인구는 100만명(한양 30만명)에 이르렀다. 경제는 농업혁신과 상업발달에 힘입어 약진했다.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세상은 점점 군인인 사무라이들에게 무예 대신 지식을 요구했다. 전투능력은 아무 쓸모가 없는 시대였으므로. 아닌 게 아니라 차고 다니던 칼도 다 녹이 슬었고, 궁한 김에 상인에게 팔아치우고 목도(木刀)를 대신 차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때마침 막부나 번(藩·봉건국가) 정부도 번교(藩校)를 세우고 향교를 지원하며 학문을 장려했다. 이전부터 있던 사숙(私塾)들은 더욱 번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지방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번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막부 말기에 이미 200개가 넘었다). 그 속도는 어느 학자가 ‘교육폭발의 시대’라고 칭할 정도로 놀라웠다. 19세기 초 다산 정약용은 벌써 일본의 학문수준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일본 유학자들의 고전주석을 인용했다. 이미 유학교육이 한풀 꺾이고 심지어는 사회적 병폐로까지 변질되었던 조선, 중국과 달리 19세기 일본은 유학(중심은 주자학)을 비롯하여 학문과 교육열풍에 휩싸였다. 번 정부는 사무라이들의 번교 출석을 엄격하게 체크했다. 한편 무예로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현실에서 젊은 사무라이들은 학문과 학교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사무라이 간의 학적 네트워크가 결국 정치화되어 메이지유신의 촉매제가 되었다. <1987>이라는 영화가 히트 중이지만 1980년대 이념 서클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19세기부터 시작된 맹렬한 공부 붐이 근대일본을 만들었다. 그 추세는 20세기 100년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독서대국도, 노벨상도, 세계적 동아시아학도 그 기반 위에서 만들어졌다. ‘문의 나라 한국’은 언제쯤 이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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