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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과학기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까?

[북한 7차 당대회 분석 ②] 역사를 통해 본 북한 과학기술정책

등록|2016.05.24 14:50 수정|2016.05.24 15:33
북한은 이번 7차 당 대회에서 자신들의 미래비전을 '과학기술'로 제시했습니다. '과학기술'을 키워드로 이번 당 대회를 분석하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새로운 북한'을 전망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기고 및 좌담으로 연재기획을 준비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하면 3대 세습, 핵 시험, 미사일 개발, 경제난, 숙청, 탈북자 등이 연관 검색어로 나오는 상황에서 북한과 '과학기술'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 것이다.

이번 7차 노동당 당 대회에서 북한이 '과학기술 강국'을 많이 언급했음에도 대다수 북한 전문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더구나 '세계 첨단 수준의 과학기술'이라는 대목에서는 허황된 것이라는 느낌마저 들 수 있다.

필자 역시 북한이 과학기술 전 분야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게 과연 현실적인 목표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북한이 적어도 과학기술에 기초한 경제 발전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이 글에서는 '과학기술 강국과' 관련한 이번 당 대회의 내용과 이러한 내용이 나오기까지 북한 과학기술 정책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이 말하는 과학기술 강국은 '기초과학부터 우주과학기술'까지 발전한 나라

김정은의 당 중앙위원회 총화보고나 당 대회 결정서에 따르면 과학기술 강국은 "나라의 전반적인 과학기술이 세계 첨단 수준에 올라선 나라, 과학기술의 주도적 역할에 의하여 경제와 국방,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부문이 급속히 발전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

즉, 북한이 말하는 과학기술 강국은 정보기술(IT)·나노기술(NT)·생물공학(BT)·핵기술 등 첨단 분야는 물론이고 기계공학·금속공학·열공학·재료공학 등 공학 주요 부문, 수학·물리학·
화학·생물학 등 기초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성과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는 나라이다.

또한 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실용위성을 더 많이 제작, 발사하여 우주강국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우주과학기술을 가진 나라이다.

또 과학기술 강국은 경제 발전에서 과학기술이 "기관차" 역할을 하는 나라, 에너지·철강재·
화학제품·식량 문제 등 경제 강국 건설에 필수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 전반을 현대화·
정보화하는 데서 과학기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이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원자력·친환경에너지 등을 개발해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주체철'(수입 연료 사용을 최소화한 제철법) 생산기술 등 북한 실정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여 수입에 의존하는 원료‧자재‧설비를 국산화하며, 농업 생산의 과학화‧공업화와 경공업 부문의 현대화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도표북한이 당 대회에서 밝힌 과학기술 강국의 내용을 정리한것 ⓒ 변학문


북한은 이번 당 대회에서 과학기술 강국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들도 자세히 언급했다. 무엇보다 북한은 과학기술 인재 양성,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중등학교 과학기술 교육 강화, 대학 학제 개편 및 교육 수준 제고, 전국적인 과학기술 보급망 확충, 공장대학·농장대학·어장대학 및 원격교육 등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 발전 등 교육 체제의 정비·강화를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특히 김일성종합대학 등 주요 대학들을 과학연구의 중심기지, 국제 학술 교류의 거점으로 만듦으로써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울 것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북한은 국가적 차원의 과학기술 지도·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연구개발의 분산과 중복 방지, 첨단돌파 계획·첨단 기술 산업화 등 전략 목표 실현, 최신 과학기술에 기초한 경제 구조 재편 등을 체계적, 효율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연구개발의 중복을 피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원과 같은 전문 과학연구 기관은 핵심 과학기술 연구, 내각 각 성·공장·기업소는 응용기술 연구, 대학은 기초과학 연구와 첨단 과학기술 개발을 담당하게 하는 등 기관 별 역할 분담을 명확히 했다.

당 대회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국가적 투자 확대도 강조되었다. 국가예산에서 과학기술 발전 사업비 비중을 점차 높이고, 지방예산과 공장·기업소의 기업소 기금도 해당 단위의 과학기술 발전에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또한 연구기관과 대학들로 하여금 첨단 기술제품 생산 및 판매를 확대하여 연구개발 자금을 확보하도록 했다.

1960년대 김일성,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 주체적 발전 가능"

이상 과학기술 강국 관련 내용은 이번 당 대회 때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짧게는 김정은 집권 이후 추진해온 정책이 집대성된 것이고, 길게 보면 1950년대 후반 이후 북한의 과학기술 발전 지향과 경험이 응집된 결과물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지난 수십 년 북한 정권에 있어 '주체'(자립, 자주성)는 국가 운영의 핵심 원리이자 이들이 달성하고자 한 최종 목표였다. 김정은이 표방한 '자강력 제일주의'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1960년대부터 주체노선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 당시 북한 과학기술의 성과가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자립의 물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1950년대 후반의 경험에서 기인했다.

북한 경제는 1950년대 후반 연 평균 공업 성장률이 36.6%에 달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이는 북한의 중공업 우선정책에 반대한 소련이 원래 약속했던 원조를 대폭 줄인 악조건 속에서 거둔 성과였다.

비날론의 성과, '기술혁신'으로 소련 도움없이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

흔히 이 시기 북한 경제의 고도성장은 '천리마운동'으로 대표되는 노력 동원의 결과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생산현장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기술혁신이 일어났고, 트랙터·화물차· 굴삭기 등을 자체 제작하는 등 기술적 진보도 거두었다. 또한 정권에 의해 생산현장으로 파견된 과학자들도 합성섬유 비날론 공업화로 대표되는 많은 연구 성과를 만들었다.

당시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립노선을 모색 중이던 북한 지도부는 위와 같은 결과를 보면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 소련의 도움 없이도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월북 과학자 리승기가 북한에 풍부한 석회석과 무연탄을 이용해 대규모 공업화에 성공한 비날론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자립노선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이후 북한은 과학기술 발전에 기초한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예컨대 북한은 1961년 제1차 7개년 계획, 1971년 6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과학기술 발전에 기초한 기술혁명'을 계획 실현의 핵심 과제로 꼽았다.

또 북한은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 개시 이후 최근까지 "인민 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 즉 '현대 과학기술에 기초한 자립경제 강화'를 추진해왔다.

따라서 이번 당 대회에서 김정은이 자강력 제일주의를 강조하면서 과학기술 강국, 경제강국 건설을 표방한 것은 1960년대 이후 김일성이 과학기술 발전에 기초한 자립노선의 물적 토대 강화를 시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1960-70년 - 쿠바사태, 베트남 전 등 안보위기 속 과학기술에 과도한 투자

북한이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과학기술 발전에 기초한 경제성장을 추진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20여 년 동안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었고, 과학자들은 '홀대'를 받았으며, 그만큼 과학기술 발전도 지체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1962년 들어 북한의 안보환경이 크게 악화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쿠바 사태, 베트남전 확전, 미국 핵무기 및 미사일의 남한 배치 증강, 일본 군국주의 부활 및 재무장 기도, 5.16 쿠데타로 남한에 군사정권 등장, 사회주의권 결속 약화와 한미일 삼각동맹 현실화 가능성 상승 등이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더해 북한과 소련의 갈등이 심화되어 소련이 북한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지원을 195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축소했다.

북한은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1962년 12월 '경제와 국방의 병진노선'(이하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경제 발전에서 일부 제약을 받더라도 우선 국방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4대 군사노선'(전 인민의 무장화, 전 지역의 요새화, 군대의 간부화, 군대의 현대화)도 이때부터 추진되었다.

병진노선 채택 이후 국방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었고, 현재 핵·미사일·장사정포·
잠수함 등의 개발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제2자연과학원의 전신인 국방과학원도 이 때 설립되었다.

국방과학원은 설립 이후 오랫동안 김일성종합대학·김책공업대학 등 최상위 대학의 우수 졸업생들을 먼저 공급받았고, 예산도 기존 과학원보다 우선적으로 지원받았다.

북한에서 국방 과학기술에 대한 우선 투자 방침은 2000년대 후반까지도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방과 민간 과학기술의 수준차가 극심해질 수밖에 없었다(최근 북한은 국방 과학기술을 밑천으로 해서 민간 분야의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한가하게 취미 본위 연구 하지 마라" 과학계 홀대하기도

국방 분야와 반대로 민간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는 크게 축소되었고, 그만큼 민간 분야는 침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정권과 과학계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정권은 과학계를 향해 국가 위기 상황에서 "한가하게 취미 본위의" 연구가 아닌 경제에 당장 도움 되는 연구를 하라고 요구했고, '자력갱생'의 자세로 연구에 필요한 설비도 가능한 한 자체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과학자들 입장에서 이는 연구의 자율성을 박탈함과 동시에 정권이 바라는 연구의 수행에 필요한 지원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1960년대 내내 지속되면서 과학자들에 대한 정권의 불신이 깊어졌다. 당시 북한 정권은 과학계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음은 인정하면서도, 과학자들이 국가 정책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으며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은 게 더 큰 문제였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불신은 1960년대 말 과학계에 대한 고강도 검열로 이어졌고, 과학자에 대한 일상적·조직적 통제가 크게 강화되었다.

위와 같은 1960년대의 여파 때문에 1970년대 북한에서 과학자 평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전문성이 아니라 '사상성', 즉 김일성의 지시와 당 정책에 대한 충실성이었고,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도 과학자의 사상성 제고였다.

예컨대 1970년 5차 당 대회에서 북한은 6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 실현을 위해 과학연구를 강화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이 때 과학연구 사업 강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로 과학원 연구 사업에 대한 지도‧통제 강화, 과학자‧기술자 '혁명화'가 꼽혔다.

사상성이 강조되고 통제가 강화되면서 과학계에서는 더 이상 당 정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상성이 강조된 만큼 전문성이 부차시되었기 때문에 과학계의 질적 수준은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또한 과학자에 대한 불신에 기초한 통제가 계속되면서 '과학자 홀대'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는 이미 결정된 과학계에 대한 투자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을 정도로 심각했고, 이로 인해 1970년대 민간 과학기술 발전은 매우 더딜 수밖에 없었다.

1980년 6차 당 대회, 과학자 '전문성' 강조하며 정책 대폭 강화

1980년 10월 개최된 노동당 제6차 당 대회에서 북한은 주체노선의 물질적 기반 강화를 위해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가 필요하며(이번 당 대회에서는 여기에 '정보화'가 추가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상성이 아닌 전문성에 기초한 과학기술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6차 당 대회 이후 북한은 과학기술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모색했고,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그 변화가 두드려졌다. 예컨대 김일성과 김정일은 오랫동안 통제와 검열, 홀대의 대상이었던 과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강조했고, 과학기술 전문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그간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금기시했던 영재교육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국민소득의 3-4%까지 과학기술 예산 확대 추진, 대외 교류협력 확대, 과학기술 발전 3개년 계획 실시(1988-91, 1991-94), 자동화·전자공학·로봇공학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 연구기관 신설‧확대 등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정책이 대폭 강화되었다.

북한이 1980년대 들어 과학기술 전문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한 것은 이들이 1960-70년대 과학기술 침체의 원인을 안보 환경 악화, 당 정책에 대한 과학자의 소극적 태도에만 돌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1960-70년대 과학기술 정책이 민간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미흡, 사상성 강조에 따른 전문성 저하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과학기술 정책의 변화는 1980년대 말 이후 동구와 소련 붕괴, 1994년 김일성 사망, 1995-97년 극심한 경제난 등이 이어지면서 10년 가까이 중단되었다. 북한 판 '잃어버린 10년'이었다.

1998년 이후 김정일,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 '신소재 첨단분야' 등 변화 주도

1980년대 과학기술 정책 변화를 주도한 김정일은 1998년 '과학기술 중시정책'을 표방하면서 1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정책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국가 목표로 제시한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사회주의 강성대국은 사상·군사·경제 강국을 의미했는데, 당시 김정일은 사상과 군사의 강국은 이미 달성했으니 경제 강국만 실현하면 강성대국이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학기술을 경제강국 건설의 핵심 방법으로 강조한 것이다.

예컨대 북한은 1998년 '제1차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이 계획을 통해 북한은 전력·석탄·금속·농업 등 전통적으로 중시해온 부문들만이 아니라 IT·BT·NT·전자공학·신소재 등 첨단 분야의 발전도 적극적으로 꾀했다.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은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고 실시되고 있는데, 계획이 거듭될수록 첨단 분야의 비중이 높아져왔다. 과학기술 분야 국가예산도 꾸준히 확대되었는데, 2004년에는 전년 대비 60%나 증액되기도 했다.

북한은 이처럼 확대된 예산에 기초해 과학기술 인재 양성, 과학연구 기관 강화, 과학자 우대 정책 확대 등을 1980년대보다 더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2009년 '광명성 2호'발사 이후, 국방 과학기술의 민수 전환 적극 추진

김정일의 과학기술 중시 정책은 2009년 4월 '광명성 2호' 발사 이후 새로운 양상에 접어들었다. 오랫동안 인적, 물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지원받으며 민간 분야에 비해 수준이 상당히 높아진 국방 과학기술의 민수 전환(스핀오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이 '첨단 수준의 과학기술'과 '지식경제'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스핀오프 전략은 자신들이 체제 유지를 가능케 하는 수준의 핵과 장거리 로켓 기술을 확보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즉, 1960년대 초 안보위기 이후 반세기 가까이 유지된 체제 생존 위협에서 탈피했으니, 그간 국방 분야에 지나치게 집중되었던 자원과 높은 수준의 국방 과학기술을 민간 분야로 돌림으로써 민간 과학기술과 경제를 단기간에 발전시키려 하는 것이다.

북한의 스핀 오프 전략은 김정은 집권 이후인 2013년 3월 '경제와 핵 무력의 병진 노선' 채택 이후 더욱 강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정은, 김정일 때보다 빠르고 과감하게 산업재편 시도 

이번 당 대회에서 북한이 밝힌 '과학기술 강국→ 지식경제 강국'은 김정일의 노선과 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김정일의 과학기술 중시정책이 1960-70년대 과학기술 정책에 내재된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고 과학기술 발전에 기초한 경제성장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김정은이 제시한 과학기술 강국 비전은 수십 년에 걸친 경험과 모색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은 김정일 때보다 더 빠르고 과감하게 과학기술 발전, 과학기술에 기초한 산업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

예컨대 고등교육 및 연구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김일성종합대학·김책공업대학·고려성균관대학 등 핵심 대학과 지역 거점 대학들의 외형 확대와 내실화를 수 년 째 추진 중이다. 2012년에는 40년 만에 초중등 11년 의무교육제를 12년 의무교육제로 개편하면서 과학기술 교육 비중을 대폭 강화했다.

과학원 생물공학분원 확대, 자연에네르기 연구소 신설, 국가나노기술국 등 과학 기관도 지속적으로 확충해왔다. 과학자 처우 개선 조치도 확대하여 다수의 과학자 주택 단지와 과학자 휴양소 등을 연이어 건설했다. 2012-15년 과학기술 예산을 연 평균 6.55%(같은 기간 국가예산 증가율은 연 평균 5.2%) 증액하는 등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도 꾸준히 확대했다.

김정은의 북한은 스핀오프, 지식경제 등 김정일 말년부터 부각된 목표들을 현실화하려는 시도도 지속해왔다.

예를 들어 군수공장들의 민간 생필품 생산 확대, 민간 공장 현대화에 군수 부문 기술자 투입 등 스핀오프를 위한 구체적인 방식들을 마련해왔다. 또한 무인화·자동화·IT화·친환경에너지 등 최신 과학기술에 기초한 생산현장의 현대화를 통해 지식경제를 실현하려 하고 있다.

이에 더해 북한은 1970년대 말 이래 북한의 경제 목표였던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에 '정보화'를 추가함으로써 지식경제 건설의 지향을 더욱 명확히 하기도 했다.

'기술 경제적 고립'속에 과학기술 발전 가능할까

북한이 이번 당 대회에서 밝힌 과학기술 강국 구상은 쉽게 실현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에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필수적일 텐데, 김정은 스스로 언급했듯이 수십 년 째 "기술 경제적 고립"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를 순조롭게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북한이 과학기술 강국 건설의 '종자돈'으로 간주하고 있는 국방 과학기술의 민수 전환도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다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학기술 강국 구상은 수십 년 북한의 경험과 모색이 응집된 것이고, 실제 김정은 정권도 지난 수 년 동안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생산현장의 현대화, 대학 및 연구소 역량 강화, 과학기술 기반 확충 등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정은 정권이 앞으로도 과학기술 발전에 주력할 것은 분명하다.

지난 4월 말-5월 초 세 명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북한을 다녀온 리히텐슈타인 알프레드 왕자도 방북 이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과학기술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자신들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방북 IPF 자문위원장 "북한 15∼20년후엔 또다른 싱가포르 될것")

따라서 향후 북한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를 전망하는 데 있어 그들이 과학기술 강국 실현을 위해 어떤 움직임을 취하며 그 결과는 어떠할 지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덧붙이는 글 겨레하나 남북관계연구자그룹의 <북한 7차 당대회 분석 연재기획> 두번째 글 입니다. 필자 변학문 박사는 '북한과학기술정책사'를 전공하였고,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외래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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