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하는 여성' 이진주 걸스로봇대표…"이공계 걸크러쉬 등장"

"지난해 12월 첫 모임, 여성 로봇 공학자 네트워크 조직"
"가장 남성적인 영역인 공학…여성 목소리 들려주고 싶어"

[편집자주]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가 2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6.7.26/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바야흐로 '걸크러쉬'(Girl Crush)의 시대다. 여성(Girl)과 '반하다'라는 뜻의 Crush On이 합성된 이 단어는 여성이 봐도 멋있는 여성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흔히 남성들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곳을 과감하게 깨부순 여성들에게도 이 호칭은 부여된다.

그런데 최근 남자들이 다수인 이·공계에서도 걸크러쉬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소셜 벤처 네트워크인 '걸스로봇'(Girls Robot)의 얘기다. 이름만 들어도 생소한 이 네트워크는 소외된 여성 로봇 공학자들이 한번 모여서 목소리를 나눠보자는 취지로 지난해 12월 처음 등장했다.

걸스로봇을 조직한 이진주 대표(여·37)는 여성 로봇 공학자는 아니다. 다만 로봇을 좋아하는 '덕질'(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하는 성향)로 일을 벌이게 됐다. 국내에서 여성 로봇 공학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최초다. 이 대표를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 "가장 남성적인 분야인 공학…그곳에서 로봇 하는 여성"



걸스로봇의 모체는 '로봇 공학을 위한 열린 모임'(로열모)이다. 로봇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인 소셜 네트워크 모임에 이 대표도 가입해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회원들 사이에서 여성들을 위한 섹션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 대표는 "로열모에서 처음에 강연을 해달라고 했다. 로봇을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어떤 점을 느끼고, 아쉬운 부분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지만 막상 강연을 해보니 말이 술술 나왔다. 그때 여성 공학자들의 모임을 따로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라고 회상했다.

생각은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여성의 '걸스'와 이공계 전반을 의미하는 '로봇'을 합쳐 걸스로봇이라 이름 짓고, 연말에 첫 강연회를 열자는 목표로 여성 공학자를 찾아 나섰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저명인사들을 찾기 위해 전국 곳곳에 열리는 로봇 학회를 찾아다녔다.

국내 여성 로봇공학계 최고참인 조혜경 한성대 정보통신공학 교수를 비롯해 이동희 독일 뮌헨대 로봇공학 교수, 박혜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연구원, 조경은 동국대 멀티미디어공학과 교수, 엄윤설 키네틱 아티스트(로봇을 활용한 예술가) 등 국내외 여성 공학자 5명이 강연자로 발 벗고 나섰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걸스로봇 1기가 됐다.

모임은 선착순으로 받은 150명이 꽉 찰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강연을 들으러 공대 여학생, 공대 진학을 원하는 중·고교생 등 다양한 참가자가 모였다. 이 자리에서 여성 공학자들의 역할과 그동안 남자 일색인 이공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등의 얘기가 오고갔다.

걸스로봇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 대표는 "남자들이 가득한 이공계에서 제 역할을 하는 여성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S전자 사원에서 기자로…결국은 '로봇덕후'

이쯤 되면 그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이 대표는 스스로를 '배회하던 삶'이라고 말한다. 기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공대를 졸업한 아버지는 공장을 하나 운영했다. 곁눈질로 기계를 계속 보다보니 대충 견적이 나왔다.

"키티 인형도 좋아했지만 메탈 마니아일 정도로 기계를 좋아했다. 지금도 기계를 다루는 분들과 어느 정도 얘기가 통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을 아끼는 마음에 절대 기계 가까이 손도 못 대게 하셨다. 그 흔한 가스레인지도 5학년에 처음 켰을 정도다"

고등학교 때 시에서 운영하는 과학 영재반에도 활동했던 그는 예상대로 공대에 진학했지만, 1학기만 마치고 자퇴해 사범대로 옮겼다. 공대의 위계적인 남성 문화에 부당함을 느꼈고, "여자는 선생님이 되어야 시집을 잘 갈 수 있다"는 아버지의 조언이 겹쳤다.

그런데 막상 사범대에 가서도 그에겐 선생님의 꿈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엉뚱하게 졸업 전에 남성들이 대다수인 S전자에 취업한다. 그곳에서 1년 반을 '꾸역꾸역' 보내다 언론인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한다.

이 대표는 "기업에서 마케팅을 했는데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늘 더 좋은 일이 하고 싶어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퇴사 이후 방황하다 글 쓰는 걸 좋아해 결국 한 중앙일간지에 입사했는데 너무 재밌어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공교롭게도 언론사 입사 전에 그는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다. 나이는 서른 살. 아이가 두 돌 때 입사시험을 보고, 그곳에서 최초의 아줌마 수습기자로 경찰서를 돌았다.

하지만 두 번째 아이를 갖게 되자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들어졌다. 치열한 언론사에서 한 사람 몫도 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잉여'가 됐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 대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건강도 나빠져 제주도로 남편과 아이와 함께 낙향했다. 일거리가 사라지자 어릴 적 관심 있었던 공학에 다시 관심이 쏠렸다. 일과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도 그 시기"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걸스로봇 1회 모임에 참석한 여성 로봇 공학자와 운영진. (출처 걸스로봇 페이스북) © News1

◇ 공학자를 꿈꾸는 여성, 대부분 '새는 파이프'

대부분의 여성 공학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고 한다. 가정과 연구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공학자의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이를 '새는 파이프' 현상이라 설명했다.

"처음에 여학생이 공대로 진학하면 '여자가 무슨 공대냐'라는 일부 편견에 맞서다 떨어져 나가고, 졸업해 결혼을 하면 출산과 육아 등으로 연구의 꿈을 접게 된다. 처음 파이프는 나름 두껍지만 여성 인재들이 이리저리 새나가 나중에는 거의 얇아지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 정부의 2013년도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에 따르면 공학계열 여학생 입학 비율은 17.5%, 전임교수 여성비율은 5%에 불과했다. 

걸스로봇은 이런 새는 파이프를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익을 대변하거나 금전적인 지원은 무리가 있더라도 최소한 “너는 외롭지 않다“는 응원 한마디라도 해주자는 것이다. 이 대표는 비슷한 해외 사례를 들었다.

"아일린 폴락(Eileen Pollack)이라는 미국 작가가 있다. 예일대 물리학과를 수석 졸업했지만 공학자로서의 확신이 없어 문학을 선택했는데, 물리학에선 전혀 없던 지지와 응원이 문학계를 가니까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탄식한다. '물리학계에서 한 번의 응원이라도 있었다면 공학자의 길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걸스로봇에 모이는 여성 공학자들도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외롭고 고독하다'는 것이다“

아일린 폴락은 이공계에서 여성들이 겪는 장벽을 파헤치기 위해 미국 전역의 여성 공학자와 여학생들을 인터뷰한 '평행우주 속의 소녀'라는 책을 썼다. 이 대표 역시 국내 여성 공학자 등을 인터뷰하고 있고, 크라우드 펀딩을 받아 올해 말에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 대표 스스로도 주변의 지지를 받기 위해 뛰고 있다. "전문성도 없으면서,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대체 왜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그는 "단순히 로봇을 좋아해서 그렇다"라는 답변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걸스로봇을 준비하고 전문성을 쌓기 위해 전국 학회는 거의 다 쫓아다녔다. 대부분 재미있었지만 어떤 학회는 너무 어려워 복도 한 켠에서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대면대면 하던 공학자도 이제는 '어 또 왔네'라며 밥을 사주신다. 그렇게 조금씩 벽을 뚫고 있다. 필요하다면 공학 대학원도 진학할 생각이다"
  
걸스로봇은 오는 10월 세계적으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지능형로봇시스템총회(IROS 2016)에도 참가한다. 이제까지 느슨한 네트워크였던 모임을 총회 전까지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정식 회원도 모집하겠다는 계획이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걸스로봇을 통해 '공학계의 여성 스타'를 발굴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별을 보고 공학자를 꿈꾸는 여학생들이 꿈을 키우고, 여성 공학자가 대세인 시대를 만들어 보고 싶다. 가장 남성적인 영역인 공학에서, 가장 미래적인 로봇 분야에 있는, 여전히 소수자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는 게 걸스로봇의 궁극적인 목표다"

k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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