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반구대 암각화-해마다 ‘물 고문’ 시달리는 비운의 국보…20년째 “보존 논의 중”

2018.07.06 16:44 입력 2018.07.06 16:54 수정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 실측도. 고래, 육지동물 등 새겨진 그림이 353점에 달한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 실측도. 고래, 육지동물 등 새겨진 그림이 353점에 달한다.

또 어김없이 장마철이다. 이맘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문화유산이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보물’인 ‘국보’이고,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선사시대 유적이다. 정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 중이기도 하다. 심지어 주변에서는 수시로 각종 문화축제도 벌어진다. 그런데도 장마철만 되면 물에 잠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비운의 문화재’다. 해마다 침수와 노출을 반복한 지 무려 50년이 넘었다. 잔인한 ‘물고문’이다.

명색이 국보인데 물에 잠기느냐고? 그럼, 훼손되는 게 뻔하지 않으냐고? 요즘 세상에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이 땅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2016년에도, 2014년에도 한 달 이상씩 물에 잠겼다. 지난해는 예년보다 강수량이 적어 침수되지 않았다. 올해는?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임시방편만 있다보니 그저 비가 적게 오길 바랄 뿐이다.

더 기막힌 일은 보존대책을 논의한 지 20년이지만 아직도 ‘논의 중’이라는 사실이다. 1995년 국보로 지정되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쳤다. 그저 말만 난무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가야사 복원’에 초점이 맞춰져서인지 뒷전으로 밀려난 듯하다. 올 장마에는 침수를 피할 수 있으려나…. 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울산 울주군 대곡리) 이야기다.

대곡천 배 위에서 본 반구대 암각화(왼쪽 사진)로 중앙 왼쪽 매끈한 바위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 발견 당시 호랑이 등 선명했던 그림들(오른쪽)은 현재는 침수와 노출 반복 등으로 훼손된 상태다.

대곡천 배 위에서 본 반구대 암각화(왼쪽 사진)로 중앙 왼쪽 매끈한 바위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 발견 당시 호랑이 등 선명했던 그림들(오른쪽)은 현재는 침수와 노출 반복 등으로 훼손된 상태다.

“7000여년 전, 선사시대인들의 ‘삶과 꿈’ 바위에 새긴 353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최근엔 공룡 발자국도
1965년 상류 사연댐 완공 후 50년째 침수·노출 반복

문화재청·울산시 보존책 놓고 갈등에도 정부는 뒷짐
2013년엔 ‘가변형 임시 물막이’ 대책 내놨지만
수십억 예산만 날리고 흐지부지…훼손은 ‘현재 진행형’ 이다

■ 바위에 새겨진 선사시대인들의 삶과 꿈

‘반구대 암각화(바위그림)’는 대곡천을 끼고 있는 반구대 절벽 아랫부분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다. 대곡천 물줄기와 거의 접하는 가로 약 10m, 세로 3m의 매끈한 바위면에 남아 있다. 반구대(盤龜臺)는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찾을 정도로 깊은 산세와 맑은 계곡, 바위절벽 등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지역 명소로 거북이 엎드린 모양이어서 반구대라 불렸다.

반구대 암각화가 국보로 지정되고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받는 것은 그림의 내용, 새겨진 시기 때문이다. 제작 시기는 이르면 7000여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분석된다. 수천년에 걸쳐 새겨졌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희귀한 선사시대 유적이다.

새겨진 그림은 무려 353점이다. 그동안 300여점으로 알려져 왔으나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실측 보고서에 따르면 모두 353점이다. 사냥꾼과 어부 등 인물상 표현이 16점, 호랑이 14점을 포함해 사슴·멧돼지·족제비·조류 등 육지동물이 105점, 고래 48점을 비롯해 바다거북 같은 바다동물과 각종 어류를 합해 97점, 고래잡이배와 그물·작살·방렴 같은 수렵어로 도구가 21점, 무엇인지 판단하기 힘든 문양과 형상 등이 114점이다. 제작기법도 다양하다. 날카로운 도구로 윤곽선을 만들거나, 아예 바위면을 떼내거나 갈아내 형상들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천년 전 반구대 주변에서 살아가던 ‘반구대인’들이 남긴 미술작품인 것이다. 여느 미술품이 그렇듯 반구대 암각화에도 그들의 삶과 꿈이 녹아 있다. 바위그림들은 사냥감이 더 많아지고 사냥활동도 더 성공적이기를 염원하는 주술적 차원에서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사슴 같은 육지동물이든 고래 같은 바다동물이든 사냥감의 대상으로 표현됐다. 또 새끼를 밴 사슴, 새끼들과 함께 있는 고래와 같이 새끼와 동반된 형상도 많다. 이는 성기를 특별히 부각시킨 남성 인물상, 교미하는 멧돼지 등과 함께 생산력, 다산과 관련된 인식을 보여준다. 여기에 사냥을 하거나 이미 사냥한 동물들을 표현한 경우도 흔하다. 당시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읽히는 대목이다.

풍성한 내용의 바위그림들에서는 사냥활동 같은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또 그들이 자연과 세상을 어떻게 봤는지 그 가치관, 정서도 나타난다. 각종 동물을 통해 당시 생태환경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작품의 하나이기도 하다. 반구대 암각화가 ‘바위에 새겨진 선사시대 역사’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 바위그림들의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는 국내외 학술대회, 고고학이나 미술사·종교학·인류학 등에서 관련 연구가 이어지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선사시대 바위그림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돼 있다. 반구대 암각화보다 더 오래된 것도 많다. 그럼에도 반구대 암각화가 국내 어느 문화재보다 국제적으로 더 관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선사시대 다양한 생활문화상을 잘 드러내는 세계적인 선사미술 걸작품이어서다. 특히 학술적으로는 인류의 해양수렵문화사를 다시 쓰게 해서다.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포경) 유적이다. 인류의 해양수렵문화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래사냥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실제 유독 고래가 많이 표현돼 있다. 혹등고래·향유고래·귀신고래 등 종류도 갖가지다. 배를 타고 고래들을 잡는 사냥 장면도 잘 묘사돼 있다. 지금 반구대 암각화 주변과 울산 등에서 고래와 관련된 여러 문화행사가 열릴 수 있는 든든한 근거도 이 암각화의 고래에서 나온다. 시공을 초월해 갖가지 영감을 던져주는 원천이 바로 문화재, 반구대 암각화다. 그것이 수천년을 이어오는 문화유산의 힘이고, 문화재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다.

최근 반구대 암각화 주변에서 공룡 발자국 화석들이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1억여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살던 공룡 발자국 화석이 100여개,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발 보행의 척추동물 발자국이 10여개 발견됐다. 여러모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 바로 반구대 암각화다.

울산대학교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최근 발표한 입체화한 실측도.

울산대학교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최근 발표한 입체화한 실측도.

■ 도대체 보존대책은 언제 나올까

그 중요성에도 불구, 반구대 암각화는 훼손되고 있다. 새겨진 그림들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이젠 건너편 전망대의 망원경으로 물을 내뿜는 고래, 새끼와 헤엄치는 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호랑이와 사슴도, 춤추는 듯한 인물상도 보이질 않는다. 대곡천을 직접 건너가 눈앞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옛 탁본이나 사진을 들이대고 비교해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다.

문화재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훼손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나무·흙 같은 재료의 문화재, 반구대 암각화처럼 비바람을 맞아야 하는 야외 문화재는 더하다. 문화재 보존·관리는 그 자연스러운 훼손을 얼마나 막느냐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훼손이 아니다. 인공시설물에 따른 훼손 가속화다. 대곡천 하류에 세워진 사연댐으로 물이 가둬지면서 침수와 노출을 반복, 풍화가 심해진다는 게 연구 결과다.

반구대 암각화가 학술적으로 확인된 것은 1971년 크리스마스 때다. 당시 동국대 조사단이 현지 주민의 제보로 확인했다. 발견 당시 암각화는 이미 침수와 노출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연댐이 1965년에 축조됐기 때문이다. 학계에 공식 발표된 이후에도 암각화는 그 가치를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20여년이 지난 1995년 6월에야 국보가 됐다.

국보로 지정되면서 보존 문제의 시급성이 알려졌다. 학계를 중심으로 소유자인 문화재청, 관리자인 울산시가 보존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도 점차 높아졌다. 2003년 보존대책 연구용역 결과가 나온 이래 그동안 여러 안들이 제시됐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책이 실행된 적은 없다.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서로 다른 보존책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어서다. 문화재청과 문화재 전문가들은 사연댐의 수위를 조절해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암각화를 영구적으로 잠기지 않게 하는 ‘수위조절안’을 강조한다. 반면 울산시는 사연댐이 울산시민 식수원의 하나인 만큼 암각화 앞에 제방을 쌓는 ‘생태제방축조안’을 내세운다. 양측의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에 정부와 울산시는 보존대책을 내놓기는커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청동기시대 문양과 신라시대 명문이 있는 인근의 ‘천전리 각석’(국보 147호)과 묶어 ‘대곡천 암각화군’이란 이름으로다. ‘대곡천 암각화군’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상태다.

보존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서 “도대체 정부는 뭐하고 있느냐”는 원성이 높아갔다. 그러자 2013년 6월 국무총리실(국무조정실)과 문화재청, 울산시는 보존대책으로 느닷없이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댐) 설치에 착수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숱한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추진됐다. 이 사업은 결국 여러 문제가 드러나면서 2016년 7월 중단됐다. 3년이라는 시간과 수십억원의 예산을 날렸다. 정부와 울산시가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위해 그나마 실행한 첫 대책의 수준은 이렇게 부실했다.

문화재청과 울산시의 공방은 지금도 계속된다. 10년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대책은 ‘마련 중’이고, 암각화는 ‘훼손 중’이다. 늘 그래왔듯 또 자문단·위원회를 구성하고, 갖가지 조사를 벌인다. 부처인 문화재청과 지자체인 울산시가 계속 부딪치는 난제의 경우 어떻게 풀어야 하나. 국무총리실이나 청와대가 조정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국무총리실, 청와대는 능력 부족인지 관심 부족인지 손을 놓고 있다. 마치 ‘폭탄 돌리기’라도 하는 모양새다.

반구대 암각화가 국보로 지정된 지 20여년, 보존대책을 논의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런데 아직 보존대책은 나오지 않는다. 정부와 지자체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하는, 참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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