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나이를 허하라

2019.02.27 20:42 입력 2019.02.27 20:51 수정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고, 설날마다 나이를 먹는 이른바 ‘한국식 나이’를 만나이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드세다. ‘한국식 나이’의 정식 명칭은 ‘세는나이’다. 본디 동아시아 공통의 나이 셈법인데 이제 우리나라만 쓰는 탓에 서구에선 ‘코리안 에이지’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역사와 현실]한국식 나이를 허하라

세는나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엄마 배안에서부터 나이를 세는 ‘생명 존중 사상’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근거 없는 소리다. 태아 생명권에 대한 인식은 0세부터 나이를 세는 유럽이 동아시아보다 훨씬 빨랐다. 유럽은 일찍부터 종교적 이유로 낙태를 죄악시했기 때문이다. 반면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낙태는 죄가 아니었다. 요샛말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먼저였다.

동아시아에 ‘0’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터무니없는 소리다. 동아시아 수학 수준은 17세기까지 유럽보다 우위에 있었다. ‘0’ 개념에 대한 인식도 유럽보다 중국이 빨랐다. 항간에 떠도는 세는나이의 유래는 전부 낭설이다.

나이 셈법의 차이는 달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은 기원전부터 양력을 사용했다. 양력은 변동이 적다. 4년에 한 번, 2월 마지막 날이 하루 늘어날 뿐이다. 이와 달리 음력은 변동이 심하다. 2~4년 간격으로 윤달이 끼고, 한 달의 길이도 매년 달라진다. 규칙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계산이 복잡하다.

음력의 변동이 심한 이유는 인간의 질서를 자연의 주기에 맞추기 위해서다. 음력 세계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의 탄생은 그 해의 자연주기에 의한 결과다. 몇월 며칠에 태어났건 그 해는 이미 시작됐으므로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친다. 음력의 시간관념에서는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나이를 먹는다.

반면 양력의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은 별개다. 인간은 자연주기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질서를 지닌 존재다. 따라서 태어난 날부터 1년이 지나야 비로소 한 주기가 완성되어 한 살이 된다. 양력의 시간관념에서는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나이를 먹는다.

음력을 사용한 동아시아 각국은 매년 새 달력을 반포했다. 달력이 바뀐다는 것은 자연의 주기가 바뀐다는 뜻이며, 인간의 질서도 따라서 바뀐다는 뜻이다. 매년 달력이 바뀌므로 생일은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확실한 기준은 새 달력이 시작되는 새해 첫날이다. 동아시아에서 새해 첫날이 특별한 이유가 이것이다. 서구에서도 새해 첫날을 기념하지만, 동아시아처럼 유난스럽지는 않다. 생일은 반대다. 원래 동아시아에서는 생일이 별로 의미가 없었다. 어려서는 돌잔치가 고작이고, 늙어서야 비로소 장수를 기원하는 생일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생일은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날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양력을 도입한 지 한 세기가 넘었지만, 해가 바뀌면 나이도 바뀐다는 음력의 시간관념은 여전히 공고하다. 예로부터 우리는 나이를 숫자로 밝히기보다 ‘갑자생’ ‘을묘생’ 식의 표현을 선호했다. 지금도 ‘몇년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서구에서는 생소한 표현이다. 그들은 태어난 해를 묻지 않는다. 나이만 묻는다. 하지만 우리는 ‘마흔다섯 살’보다 ‘1975년생’이, ‘스무 살’보다 ‘2000년생’이 가늠하기 쉽다. 노년층은 ‘용띠’니 ‘말띠’니 하는 나이 셈법에 익숙하다. 이 모두가 같은 해 태어난 사람은 같은 나이라는 전통적 시간관념의 산물이다. 나이 셈법을 만나이로 통일한다는 것은 음력에 바탕한 전통적 시간관념과의 결별을 뜻한다.

12월 말일에 태어난 아이는 하루만에 두 살이 된다며 세는나이가 비합리적이라 하는데, 그건 만나이도 마찬가지다. 오늘 태어난 아이와 작년에 태어나 내일 생일을 맞는 아이는 12개월 가까운 간격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0세다. 1년 단위로 나이를 먹는 이상 셈법 관계없이 불가피한 현상이다. 어차피 아이들은 개월수를 따지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나이 셈법이 달라 혼란스럽다면 법적 연령을 통일하면 그만이다. 행정편의주의의 산물인 ‘연나이’만 없애도 혼란은 줄어든다.

음력의 시간관념을 차마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양력 사용을 강요받았다. 일제는 생일도 제사도 명절도 양력을 따르도록 했다. 만나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일제강점기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음력 문화의 상실을 일제에 대한 굴복으로 인식하고 음력을 고수했다. 오늘날까지도 음력에 대한 애착이 유난한 이유다. 이러한 정서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세는나이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서구의 전통과 관습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서구의 전통과 관습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애야 한다면, 없애야 할 것이 세는나이뿐이겠는가. 글로벌 스탠더드란 그런 것이 아니다. 각국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고,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오늘날 세계가 지향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전통명절 설날과 외래명절 성탄절이 공존하는 것처럼, 세는나이와 만나이도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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