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받을까 두려워”… 軍 소원수리함 역할 하는 靑 국민청원

“군내 시스템 통해 신고했다간 지휘관·선임자에게 보복 당할까 우려”

최근 공군 ‘황제병사 논란’을 비롯해 ‘여단장의 폭언 의혹’ 등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군부대 내 부조리를 털어놓는 글들이 연이어 오르며 청원 게시판이 이른바 군대 내 ‘소원 수리함’처럼 고발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군인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익명으로 고민을 털어놓는 세태와 맞물려 혹여 부대 내 시스템을 통해 신고했다 지휘관이나 선임에게 보복을 당할까하는 우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큰 파장 불러일으키는 군대 관련 청와대 청원

 

부대 내 문제를 다룬 청원 글은 그동안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아 왔다. 지난해 6월 한 청원인이 ‘모 중장의 보직 해임을 요구한다’라고 올린 글은 한달간 2만명 가량의 동의를 받았으나 각종 커뮤니티와 SNS 등으로 확산되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는 “현역 군단장이 비합리적인 부대 운영과 지휘, 명령으로 젊은 장병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며 ”(군단장이) 특급 전사만을 강요하며 특급 전사가 되지 못한 장병은 휴가와 외박을 제한시키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를 두고 온라인 상에서는 “훈련이 과도하다”는 지적과 “군 기강이 해이하다”라는 지적이 맞서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공군 ‘황제병사 논란’을 낳은 지난 12일 ‘금천구 공군 부대의 비위행위를 폭로합니다’라는 청원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며 군 장병들의 청원 러시를 이끌었다. 자신을 부사관이라 밝힌 청원인은 “해당 병사가 매주 토요일 아침 빨래를 부대 밖으로 반출해 가족 비서에게 세탁해오게 하고 빨래와 음용수를 받아오는 과정에 부사관을 사역시키고 있다”며 1인 생활관 사용, 무단 외출 등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해당 병사의 부모가 한 신용평가회사의 임원이란 사실이 알려지며 관심을 모았고 부대 내 감찰과 수사로 이어졌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

이후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최근 황제 병사로 문제되고 있는 부대의 직속부대 비위를 추가로 폭로한다’는 다른 군인의 글이 올라와 “대대장이 올해 초에도 폭언 갑질 횡령 등 수많은 비위 의혹으로 조사를 받았지만, 징계가 아닌 주의 경고 조치를 받는 데 그쳤다”고 추가 폭로가 이어졌다.

 

지난 18일에는 한 육군 여단장의 폭언을 폭로하는 글이 올랐다. 청원자는 해당 여단장이 예하부대의 일병에게 “너는 뭐가 불만이냐. 태도가 왜 그러냐”라고 지적한 뒤 여단장실로 불러 부모까지 거론하며 인격모독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육군은 “여단장 지휘 활동 제보와 관련, 육군본부 인권조사관 등이 오늘 감찰 조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예정”이라며 감찰에 들어간 상태다.

 

◆ 군 내부 소원수리에 대한 불안과 병사 휴대전화 사용으로 청원·SNS 폭로 증가

 

이처럼 군인들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군대 내부의 부조리를 폭로하기 시작한 것은 병사들이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군인들은 최근 청와대 청원뿐만 아니라 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부대 내 고민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페이스북 페이지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는 군대 내에서 발생한 사고나 병영 생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등 군인들이 올린 일상 글들이 공유되고 있었다.

 

해당 사진은 기사 특정내용과 무관함. 연합뉴스

군대 내 설치된 소원 수리함에 대한 불신도 군인들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2014년 육군 제28사단에서 발생한 윤모 일병 폭행 사망사건 이후 군내 소원수리 문제는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윤 일병의 동료 병사들은 “부대가 소원수리를 할 수 없는 분위기다”, “간부들이 묵살한다” 등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병사가 소원수리를 하더라도 신고한 병사의 신상정보가 제대로 보호되지 못해 자칫 보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이후 병사들이 국방부와 각급 부대에 설치된 국방신고센터에 인터넷으로 소원수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생겼지만 신상공개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공군 황제복무 병사’를 폭로한 청원인은 “저번 감찰 때 우리부대는 내부고발자를 색출하려고 전역한 병사들의 인사자력까지 인쇄해갔다”고 신상공개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해당 부대장을 추가로 폭로한 청원인 역시 “감찰 조사 과정에서 진술자들이 공개돼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보복조치가 이뤄지고 있다”며 “청원이 올라간 후 이뤄질 2차 가해가 두렵다”고 했다.

 

해당 사진은 기사 특정내용과 무관함. 연합뉴스

◆ 청원으로는 공익신고 보호받을 수 없어

 

하지만 청원인들이 공익신고자로서 보호받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에 따르면 공익침해 행위를 지도 감독, 조사할 수 있는 감독기관 및 수사기관 등에서만 공익신고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은 조사권, 수사권이 없어 신고를 해도 정부의 보호를 받는 공익신고자 신청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미래통합당 지성호 의원실이 지난 17일 국민권익위원회에 이같은 문의를 한 결과 “국민청원 게시판 내용만으로 공익신고자 보호법에 따른 공익신고자로 보기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 의원은 “이번 기회로 청와대 국민청원 시스템이 사회적 약자의 호소를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며 “군 인권 사각지대 해결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