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 영국 내각의 '비공식' 유럽 담당 장관 맡았다"

대표적 브렉시트 반대론자, 英 매체에 기고
불어 유창한 찰스 3세, 유럽 문제에도 정통
"임기 동안 유럽과 관계 개선에 매진할 듯"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유럽은 사이가 멀어졌다. 그런데 최근 영국 정부에 비공식적인 유럽 담당 장관(unofficial minister for Europe)이 출현했다. 다름아닌 새 국왕 찰스 3세다.’

영국 정부의 유럽 담당 장관을 지낸 데니스 맥셰인. 게티이미지 제공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로 나빠진 유럽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찰스 3세를 활용하고 국왕 역시 기꺼이 이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분석이 영국 국내에서 제기돼 눈길을 끈다. 진보 성향의 작가이자 브렉시트 반대론자인 데니스 맥셰인 전 유럽 담당 장관은 20일(현지시간) 영국 언론 ‘디 아티클’에 기고한 글에서 찰스 3세를 “우리(영국)의 새로운 유럽 담당 장관”이라고 부르며 이같이 설명했다.

 

맥셰인은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인 1903년 당시 영국 국왕이던 에드워드 7세에 관한 얘기로 글을 시작했다. 찰스 3세의 고조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에드워드 7세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프랑스 와인과 문화를 사랑했다. 그 시절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확장 등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사이였다. 1903년 프랑스를 국빈방문(state visit)한 에드워드 7세는 뛰어난 친화력으로 프랑스인들을 사로잡았다. 이듬해인 1904년 영국·프랑스는 흔히 ‘앙탕트 코르디알’(Entente Cordiale)로 불리는 영·불협약을 체결한다.

영국 국왕 찰스 3세(왼쪽)가 왕세자 시절인 지난 2021년 11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한 모습. 당시 두 사람은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 참석을 계기로 만났다. BBC 홈페이지 캡처

이로써 두 나라는 오랜 기간 지속된 경쟁과 반목을 청산하고, 유럽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강국 독일에 공동으로 맞서게 된다. 영국·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내내 동맹 관계였으며 지금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통해 동맹국으로 남아 있다.

 

맥셰인은 찰스 3세를 에드워드 7세와 비교했다. 찰스 3세도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남다르다. 이는 지난해 별세한 그의 모친 엘리자베스 2세와도 공통적이다. 맥셰인은 “각료 대다수가 영어 말고 다른 언어는 할 줄 모르는 수낵 내각과 비교해 찰스 3세는 유럽의 정치와 역사에 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단언했다.

 

찰스 3세는 이미 내각의 ‘비공식 유럽 담당 장관’으로서 역할을 시작했다. 최근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EU와의 브렉시트 후속조치 협정은 ‘윈저 프레임워크’로 불린다. 영국 왕실을 뜻하는 ‘윈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영국와 EU의 관계 개선에 대한 찰스 3세의 염원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이 협정 타결을 위해 2월 영국을 방문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찰스 3세와 만나 정상회담과 비슷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국 국왕 찰스 3세(왼쪽)가 지난 2월27일 영국을 방문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맥셰인은 찰스 3세가 앞서 영국의 지원을 호소하러 런던에 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버킹엄궁에서 만난 사실도 언급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에서 군주는 ‘정치 불개입’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찰스 3세는 즉위 전에는 물론이고 즉위 후에도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 또한 유럽에 대한 찰스 3세의 관심을 보여준다는 게 맥셰인의 분석이다.

 

찰스 3세는 프랑스(26∼29일)·독일(29∼31일) 국빈방문을 앞두고 있다. 즉위 후 첫 국빈방문 대상국으로 캐나다나 호주 같은 영연방 회원국 대신 유럽 국가들을 택한 점, 특히 프랑스·독일이 나란히 EU를 이끌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향후 영국은 유럽을 중시할 것’이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마침 수낵 총리는 지난해 체코에서 열린 유럽정치공동체(EPC) 회의를 올해 런던에서 주최하는 방안을 강력히 추진 중이다. 맥셰인은 “찰스 3세가 유럽 정치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만들기 위해 에너지를 쏫아붓고 있다”며 “국왕은 영국을 유럽 국가들과의 동반자 관계로 되돌리는 데 전력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맥셰인은 노동당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인 출신으로 토니 블레어 총리 내각에서 유럽 담당 장관을 지냈다. 유럽 정치, 그리고 브랙시트를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저서와 논문, 언론 기고문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