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러시아 과소평가…남북 대화·통일에 활용해야”

중앙일보

입력 2016.02.05 01:08

수정 2016.02.0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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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박7일간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은 러시아를 과소평가하지 말고 경제·평화·안보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우리 정치 현실은 우물에 빠진 정치다. 새판을 짜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최근 러시아에 다녀온 손학규 전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31일 귀국길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2014년 7월 정계를 떠난 이래 정치 현안에 대해 침묵을 지켜온 그가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내놓은 셈이다. 야권 분열로 정국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손 전 대표를 만났다. 그는 국내 정치에 대한 질문은 사양하겠다고 전제하면서 지난달 러시아 극동문제연구소 초청으로 6박7일간 러시아를 방문하고 느낀 소회를 밝혔다.

[직격 인터뷰] 김영희 대기자 -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대담

김영희=러시아에 가 보니 한국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죠.

손학규=한국의 손을 잡고 싶은데 한국이 외면해 매우 섭섭하다고들 했습니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동방정책을 펴면서 한국과의 협력에 기대를 많이 해 왔습니다. 러시아는 그동안 터키에서 의류를 보급받아 왔는데 지금 터키와 관계가 나빠져 있으니 한국이 의류를 러시아에 수출하면 좋을 것이란 얘기를 할 정도입니다. 러시아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얘기도 합니다. 러시아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는 의지가 강하죠.

김=그런 의지를 촉진시킨 배경은 우크라이나 사태라고 봐야겠죠.


손=그렇습니다. 우크라이나 때문에 서방과 틀어지니까 시선을 아시아로 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또 미국과 중국의 패권싸움 틈새로 들어가려는 의도도 있다고 봅니다. 러시아는 지금 어렵습니다. 어려울 때 도와줘야지 러시아가 잘될 때 한국의 입지가 생깁니다.

김=하지만 푸틴 대통령의 동방정책이 목소리는 크지만 실천적 측면은 약해 보입니다.

손=러시아는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북한과 협력하고 극동 시베리아에 진출해 아태 국가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인 듯합니다.

김=그런 점에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관계도 중요할 듯합니다.

손=러시아인들이 ‘한국은 극동 시베리아 개발에 소극적인 반면 일본과 싱가포르는 투자를 많이 한다’고 하더군요. 나진·하산 프로젝트만 해도 러시아 지분의 49%를 한국 컨소시엄이 차지했음에도 투자가 미진하니 나진항 3부두를 러시아 돈으로 완공했습니다. 코레일·포스코·현대상선 등 우리 기업들은 러시아 진출을 위해 정부에 지원을 요구하지만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미온적인 반응입니다. 러시아는 이런 게 불만입니다. 물론 러시아도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압니다. 그러나 유럽은 공식적으론 제재에 참여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와 많은 협력을 해 왔는데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러시아는 경제뿐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한국에 서운한 눈치입니다. 지난해 러시아 전승절 70주년 행사에 한국이 보낸 특사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는 겁니다. 중국 전승절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간 것과는 대조적이라는 것이죠. 박 대통령이 2014년 소치 올림픽 행사에 가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올림픽 개막식에는 차기 올림픽 개최국의 국가 원수가 참석하는 게 관례인데 말입니다.

김=저도 재작년에 러시아에서 언론인들을 만났는데 ‘한국이 러시아를 너무 얕잡아 본다’고 불만이 많더군요.

손=우리의 국립외교원장 격인 바사노프 박사가 ‘우리는 북한체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북한의 핵무장도 반대한다’고 하더군요. 이런 안보상의 이해 때문에 러시아는 한국과 손을 잡으려 하는데 한국의 반응은 왜 미온적이냐고 했습니다. 한반도 주변 국가 중 통일을 지지하는 나라는 러시아밖에 없다고도 했습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러시아가 아태 국가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한국도 극동 시베리아에 진출할 수 있어 이해가 일치하는데도 한국이 냉담하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김=러시아를 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손=부끄러운 얘기인데 미국·일본·중국은 숱하게 많이 갔다 왔지만 러시아 방문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게 그동안 우리가 러시아를 어떻게 대했느냐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입니다. 구소련이 6·25전쟁을 뒤에서 조종한 점이나 이념적인 문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러시아는 군사강국이고 핵·우주항공기술 등 잠재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 보니 로마노프 왕조의 영화가 느껴지고 건물 하나하나가 역사더군요. 또 러시아는 우리가 독립운동 하던 시절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우리가 활용하지 못하니 러시아인들은 ‘한국이 우리를 멸시한다’고 보는 것 아닙니까. 우리 식자층조차 러시아를 자원의 공급처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부 때 러시아 가스공사는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했지만 푸틴 대통령이 한국과의 협력을 생각해 천연가스 송유관 협정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송유관 건설비용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 서로 옥신각신하다 흐지부지됐습니다. 또 6자회담이 열렸을 때 한국이 러시아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까. 이런 걸 러시아인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김=88올림픽 때 구소련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중앙일보가 볼쇼이발레단을 데려왔는데 입장권이 며칠 만에 동났습니다. 그렇게 환대하다가 소련이 망하니까 멸시하고 있습니다.

손=극동문제연구소장 티테란코 박사가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 당시 서기장 지시를 받고 한국을 방문한 뒤 돌아가서 ‘한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합니다. 88올림픽 때 구소련이 북한에 ‘올림픽을 훼방 놓지 말라’고도 했답니다. 88올림픽 성공에 구소련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김=티테란코 박사가 실제로 한·소 수교에 상당한 역할을 했는데도 한국은 그를 잊고 있습니다.

손=티테란코는 지금 건강이 나쁩니다. 암을 앓고 있는데도 일부러 나를 만나려고 나왔다고 합니다.

김=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들은 게 있습니까.

손=러시아는 북핵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존중해 왔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핵확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강조했습니다. 냉전 시절 동독과 중국이 그렇게 핵무기를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 바람에 중국과 관계가 나빠졌다는 얘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러시아는 주변국과 평화롭고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북핵은 물리적 압박이 아니라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죠. 박 대통령이 5자회담을 거론하자 러시아 외무장관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을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싱크탱크 관계자 3명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푸틴 대통령이 ‘내가 어렸을 때 쥐를 잡으려고 코너로 몰았더니 쥐가 물려고 했다’는 일화를 얘기한다는 겁니다.

김=하지만 북핵 문제에서 러시아의 참여는 제한돼 있어 우리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손=러시아 외무장관이 5자회담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북한과 교역을 10배 늘리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러시아에 가기 전 주한 러시아대사를 만났는데 ‘대북 제재에 동의한다’면서도 두 가지 전제를 달더군요.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를 해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김=그렇다면 대북 제재를 하지 말자는 얘기 아닙니까.

손=그렇습니다. 북한의 핵무장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해치고 군비 확장을 가져오니 제재에 찬성하지만 그것이 지역 평화나 북한 주민의 생활을 해쳐선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러시아는 직접적으로 북핵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까지 합니다.

김=러시아가 북한을 보는 시선엔 그런 심리가 깔려 있을 겁니다.

손=남북이 평화적으로 교류해야 러시아의 극동 시베리아 개발과 아태 진출에 도움이 된다는 게 러시아 생각입니다.

김=거기가 우리가 러시아를 활용할 부분이겠습니다.

손=바로 그겁니다. 러시아는 아태 국가 진출의지가 확고합니다. 한국과 미국·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 아닙니까.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러시아가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하도록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손 전 대표께서 생각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방안은 무엇입니까.

손=한반도엔 두 가지 패러독스가 있습니다. 하나는 평화와 통일의 패러독스, 또 하나는 자주와 의존의 패러독스입니다. 전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통일을 얘기하는 한 통일은 오지 않는다. 통일을 얘기하지 않아야 오히려 통일이 온다’고 했습니다. 먼저 평화를 추구하면서 그 속에서 실질적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평화는 공존이고, 공존은 분단체제 인정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91년 남북 기본합의와 유엔 동시 가입, 한반도 비핵화가 이런 체제입니다. 이건 김대중 체제가 아니라 노태우 체제였습니다. 분단을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공동으로 번영을 이룩하면 통일의 바탕이 되는 겁니다.

김=그게 독일 통일의 모델이죠. 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 모델인데 그는 분단을 인정함으로써 분단을 극복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되 말하지 말자고 했어요. 어쨌든 우리의 대러시아 외교가 너무 성의 없다는 결론이네요.

손=러시아는 큰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가 제대로 끌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는 두 번째 패러독스와 관계가 있습니다. 통일은 자주적으로 하되 주변 4강의 지지가 없으면 안 됩니다. 독일이 러시아의 허락 없이 통일됐겠습니까.

김=에곤 바도 독일 통일은 모스크바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손=우리는 남북 간에 자주적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평화체제가 이뤄지고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이 보장해 주는 방향으로 가야죠. 그런데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는 상태에서 중국이 우리 주도 통일을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미국이 중립적인 통일을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미국과 북한의 국교가 정상화돼야 합니다. 또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김=마지막 질문입니다. ‘한국 정치의 새판을 짜야 한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새판을 짜야 합니까.

손=(웃음) 그건 천천히 답하죠. 오늘은 우리나라가 국내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막혀 있다는 얘기만 하겠습니다.

김=정치는 일절 안 할 겁니까.

손=동아시아의 미래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에 다녀왔습니다. 러시아의 존재를 재인식해야 합니다.

김=그런 모든 것을 정치가 발목 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

손=저는 2014년 7월 31일 정치를 떠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때 그 자세 그대로 우리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어떻게 기여할 것입니까.

손=그것을 찾는 마음으로 전남 강진에서 다산 옆에 있습니다.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강찬호 논설위원
사진=신인섭 기자


손학규는…

▶1947년 경기도 시흥 ▶서울대 정치학과·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인하대·서강대 교수 ▶경기도지사 ▶보건복지부 장관 ▶14·15·16·18대 국회의원 ▶민주당 대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2014년 7월 31일 정계은퇴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