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은행, 덴마크 상점에선 “현금 안 받아요”

중앙일보

입력 2016.02.23 01:49

수정 2016.02.23 10:15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부산에 사는 가정주부 조모(36)씨는 최근 서울에 사는 대학 후배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는 은행의 간편송금 서비스를 이용해 5만원을 보냈다. 후배에게 계좌번호를 물어볼 필요 없이 휴대전화 번호만 알면 송금할 수 있다.

조씨는 “후배가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아도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후 자신의 계좌번호만 입력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며 “결혼식에 참석하는 다른 친구에게 축의금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할 일이 없어서 편하다”고 말했다.

[궁금한 화요일] 핀테크가 앞당긴 ‘현금 없는 사회’

 직장인 박모(39)씨는 은행 자동입출금기(ATM)에서 현금을 뽑은 지가 꽤 됐다. 편의점이나 음식점·카페 등을 이용할 때면 주요 정보기술(IT) 회사에서 내놓은 각종 ‘○○페이’를 쓴다. 옷이나 생활용품 등은 출퇴근길 모바일 쇼핑으로 해결한다.

박씨는 “스마트폰에 있는 모바일 카드로 지하철을 타고 돈도 뽑을 수 있더라”며 “깜빡 잊고 지갑을 집에 두고 나온 적이 있는데 별 불편함을 못 느꼈다”고 했다.
 
 
 현금이 ‘왕’인 시대가 저물고 있다. 신용카드와 인터넷 뱅킹, 모바일 결제 등이 빠르게 현금을 대체하면서다. 선진국에서는 현금 사용을 줄이는 일이 중요한 경제정책으로 떠오를 정도다. 이처럼 비현금 결제가 일반화되면서 머지않아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스웨덴의 초등학생인 안드레아스 빌머와 유치원생 알빈 형제는 2년간 저금통에 모은 동전 700크로나(약 10만3000원)를 입금하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가 입만 삐죽 나왔다. “현금은 받지 않는다”는 은행 직원의 말을 듣고 나서다.


스웨덴 일간지 ‘스벤스카 더그블라넷’에 따르면 스웨덴 4개 대형 은행 중 모든 영업점에서 현금을 취급하는 곳은 한 곳뿐이다. 다른 3개 은행은 현금을 받은 지점의 비율이 5곳 중 한 곳꼴에 지나지 않는다.

 1661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지폐를 발행한 스웨덴은 이제 거꾸로 현금 없애기에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스웨덴에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현금을 사용할 수 없다. 심지어 성당·교회에선 카드 리더기를 설치해 헌금함을 대신하고 있다.

다른 나라도 ‘현금 없는 사회’를 위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덴마크는 ‘현금 거래 의무제’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앞으로 상점은 현금을 받고 싶지 않으면 이를 거부할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등은 일정 금액 이상 거래 시 현금 사용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세계 최초의 현금 없는 국가’ 추진위원회를 정부 주도로 발족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의 지급수단별 이용 비중은 금액 기준으로 신용카드가 50.6%로 가장 높고 체크·직불카드 19.6%, 현금 17%, 계좌이체 12.4% 순이다.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51.1%에서 계속 줄고 있다. 이는 세계 주요국과 비교해도 가장 적은 수치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동전 대신 충전식 선불카드에 거스름돈을 입금해 주는 방식으로 ‘동전 없는 사회’ 만들기를 추진하며 세계적인 추세에 발을 맞추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1950년대 신용카드가 등장하면서다. 이후 지금까지 현금 퇴출에 앞장서 온 신용카드는 이젠 금융과 IT기술이 결합한 핀테크(FinTech)에 ‘바통’을 넘기고 있다.

애플페이·삼성페이·안드로이드페이 같은 모바일 결제가 대표적이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낼 필요 없이 애플리케이션이 설치된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를 단말에 갖다 대고 물건 값을 결제하면 된다.

▶관련 기사 삼성 아닌 삼성…여기서 ‘삼성페이’가 나왔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SNS 친구끼리 돈을 부치고 받을 수 있고, 페이팔 등을 이용하면 e메일 계정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송금할 수 있다.

공인인증서나 액티브X 설치 같은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처음 결제 때 카드 정보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되기 때문에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도 증가하고 있다.

 건국대 금융IT학과 오정근 특임교수는 “세계 주요국에서 현금을 대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현금은 빠른 거래 처리 속도와 익명성 같은 속성 덕에 소액거래에서 중요한 지급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현재 한국 사회는 현금 없는 사회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는 각종 핀테크가 결제의 주역으로 현금을 대체하면서,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이끌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 주요 IT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각종 모바일 결제, 간편결제 등의 핀테크 서비스를 내놓는 것도 이런 패러다임 전환기에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다.

▶관련 기사 뱅크 없는 뱅크 시대... 인터넷전문은행, 카카오•KT 웃었다

현재 국내에서만 이미 출시됐거나 출시 예정인 각종 모바일 결제 서비스는 20개가 넘는다. 스마트폰 제조사, 이동통신사, 포털,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IT·게임업체, 인터넷전문은행 등 서비스 제공업체의 주력 분야도 각양각색이다.

한 모바일 결제 서비스 업체 관계자는 “사실상 수수료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서버 관리 등 운영비를 쓰면 적자가 나는 셈”이라며 “소비자가 특정 방식에 익숙해지면 계속 그것만 이용하는 이른바 ‘록인(Lock-In) 효과’를 기대하고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핀테크 서비스를 통해 유통업체는 자사 제품·서비스를 꾸준히 구매하는 충성도 높은 고객 확보를 노린다. 제조사들은 자사 IT기기 판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한다.

포털에서는 광고 수익 증대와 함께 O2O(온·오프라인 연계 서비스)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공통적으로는 ‘결제 정보’라는 빅데이터를 수집해 사용자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 마케팅이나 부가 사업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이들 회사가 기대하는 효과다.

 미래학자들은 정맥·홍채 인식 같은 생체정보로 결제하는 시스템이 상용화되면 진정한 ‘현금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한다. 지갑이나 별도의 기기를 몸에 지니지 않고도 자신 만의 고유한 생체정보로 각종 물건·서비스 값을 지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핀테크의 부작용으로 지목되는 카드정보 유출, 해킹 등의 가능성도 작다. 씨티그룹은 홍채 인식 등을 활용한 ATM기 도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페이팔은 심박수 등으로 인증하는 새로운 생체인식 기술을 구상 중이다.

하나금융연구소 김문태 연구원은 “모바일 금융이 늘고, 보안에 대한 우려가 큰 국내에서도 금융권을 중심으로 생체인식 기술의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며 “해외 활용 사례와 인증 수단별 특징 등을 참고해 편리하고 안전한 금융 거래 시스템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사 인터넷은행발 '빅뱅'…금융판도 바꾸나

국가마다 현금 퇴출 왜

돈 발행 비용 줄고 탈세·도난범죄 예방 효과

현금 퇴출 움직임은 현금 사용이 낳고 있는 여러 부작용 때문이다. 우선 현금은 동전·지폐를 발행하고 관리·폐기하는 데 상당한 규모의 재정적 비용이 들어간다. 현금 사용을 줄일수록 이런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상인·고객 입장에선 계산대에서 잔돈을 계산하거나 현금을 저축하기 위해 은행을 찾는 등의 번거로움이 사라진다. 특히 현금은 지하경제의 원천이다. 맥킨지앤컴퍼니에 따르면 현금결제 비중과 지하경제 규모는 반비례 관계를 나타낸다. 전자거래가 활성화하면 모든 거래 기록이 남기 때문에 지하경제를 양성화할 수 있고 투명한 과세가 가능하다.

현금이 적으면 정책적으로도 훨씬 유연한 통화정책을 펼 수 있고 효과도 확실하다. 예컨대 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추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현금을 보유한다면 통화정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이른바 ‘유동성 함정’이다. 그러나 화폐를 모두 전자화하면 사람들은 마이너스 금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돈을 쓸 수밖에 없다.

여신금융연구소 이효찬 실장은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들면 현금을 보유하면서 발생하는 강도·절도 같은 범죄는 물론 탈세·뇌물 등을 줄일 수 있다”며 “경제 시스템 각 부문의 비효율성을 제거해 경제 성장을 유도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완벽한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현금을 없애고 전자화폐만 사용하면 정부는 국민 개개인이 언제 어느 곳에 돈을 썼는지 감시할 수 있다. 나의 모든 수입·지출이 정부의 손바닥 안에 있는 셈이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모든 돈을 국가의 통제 아래에 있는 계좌에 넣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보안 문제와 정보유출 가능성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만약 전산망이 잘못되면 국가 시스템 자체가 마비되는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전자결제가 보편화한 스웨덴에서 지난 10년간 카드 사기가 두 배로 늘어났다”며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공포가 있다”고 전했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