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지켜온 '美所' 굿바이 호암갤러리

중앙일보

입력 2004.01.08 19:50

수정 2004.01.0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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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9월 열렸던 '사진예술 160년전'에서 설명을 듣는 관람객들.
사람이 나고 죽듯이 미술관도 태어나고 사라진다. 2월 29일까지 열리는 '아트 스펙트럼 2003'전을 마지막으로 간판을 내리는 호암갤러리 또한 역사 속으로 떠나는 미술관이 됐다. 호암갤러리를 운영해온 삼성미술관이 오는 10월 서울 한남동에 지은 새 건물로 옮겨 가면서 빌려 쓰던 이 자리를 내놓게 됐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미술사가 손꼽는 굵직굵직한 전시회를 기획한 미술 명소 하나가 아쉽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호암갤러리가 문을 연 것은 1984년이다. 개관 당시의 이름은 중앙갤러리였다. 84년 9월 22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연 '아르 누보 유리명품전'을 기념전으로 20년에 걸친 화랑사가 시작됐다. 첫 전시를 기획하는 현장에 손을 보탰던 이규일 '아트 인 컬쳐'대표는 "상업화랑 몇 곳을 빼고 나면 변변한 전시 공간이 없던 서울 중심가에 기획전만 여는 미술관을 마련한다는 자부심이 컸다"고 돌아봤다.

20년 세월 동안 호암갤러리가 연 전시회는 줄잡아 1백건이 넘는다. 동양과 서양, 옛 것과 새 것을 넘나들며 한국 관람객들을 다양한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다. '독일 현대미술전' '아프리카 미술전' '소련 현대미술전' '이탈리아 트랜스 아방가르드전' '프랑스 설치작가 8인전' '고대 이스라엘 문명전' '뉴욕 현대미술전''미국 현대사진전' 등이 우리 눈을 세계 미술로 뜨게 도와준 전시회들이다.

한국 전통미술에 대한 재평가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95년에 연 '대고려 국보전'은 18만5천명이 찾아와 즐겼고, 97년에 기획한 '조선 전기 국보전'에는 11만5천명이 몰렸다. '고려 불화 특별전' '분청사기 명품전' '매혹의 우리 민화전' '조선 목가구대전' '격조와 해학:한국의 근대미술'등이 우리 미술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국 화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펼쳐 보이는 것도 호암갤러리의 몫이었다. '남관 창작 50년의 예술 세계전''우향 박래현전''이중섭전' '성재휴 회고전' '박상옥 유작전' '권진규 회고전' '석전 황욱전' '최욱경전' '김종영 조각전' '유영국전''우리의 화가 박수근전''이인성전''백남준전'등이 이어졌다. 89년 1월 1일 개막한 '이응노전'은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고국을 그리워하던 화가가 전시를 며칠 앞두고 타계해 아쉬움을 남겼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호암갤러리에서 여는 전시는 꼭 가서 봐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며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기획을 이어온 그 정신이 한남동으로 옮겨서도 계속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재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