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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리포트]러시아 노인들, 시골별장서 농부-목수 변신

입력 | 2002-07-02 16:35:00

골로바노프씨는 주말별장인 다차로 이사온 뒤 직접 집을고치고 정원을 가꾸느라 바쁘다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투치코바 마을. 유리 골로바노프(61)와 부인 리디야(60)는 지난해부터 이곳에서 전원 생활을 시작했다.

대외경제성 관리로 덴마크 등 서방에서도 근무했던 그는 모스크바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모스크비치(모스크바 시민). 대도시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았던 부부가 겨우 40가구가 사는 한적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순전히 자의는 아니었다.

자식에게 아파트를 사 줄 형편이 못된 이 부부는 은퇴를 계기로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아파트를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이곳으로 이사왔다.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무상으로 주택을 줬던 소련 시절과 달리 요즘엔 젊은이들이 자기 집을 갖기가 무척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마당을 포함해 300여평 남짓한 집은 원래 이 가족의 ‘다차(Dacha·교외에 있는 텃밭이 딸린 별장)’였다. 국가로부터 받은 땅에 직접 나무로 집을 짓고 빈터에는 감자 등을 심고 주말이나 여름휴가 때나 들르던 곳이었다. 은퇴하자마자 대충 집을 고치고 완전히 이사왔다. 다행히 모스크바와 그리 멀지 않아 수도와 전기, 가스는 이미 연결돼 있었다.

연금생활자 키빈존씨(오른쪽 어린이 안고 있는 이)가 자신이 살고 있는 다차로 친지들을 불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사진=모스크바 김기현특파원]

골로바노프씨는 아직도 집을 손보는 일로 하루종일 바쁘다. 담장이며 차고, 정원 등을 직접 만들거나 수리한다.

모스크바에서 10㎞ 떨어진 므이트냐 마을. 역시 ‘펜시오네르(연금생활자)’인 타티아나 키빈존(57·여)은 2년 전 모스크바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할아버지대부터 물려받은 다차를 멋진 전원주택으로 개조했다. 꽃을 공급했던 국영기업인 ‘모스츠베토크’에서 오래 일했던 그는 정원을 꾸미는 데 열심이다.

숲속을 거닐거나 냇가에서 고기를 낚고 버섯을 따고 이웃과 함께 숯불을 지펴 샤스리크를 해 먹는다.

샤스리크는 돼지고기나 양고기 꼬치구이를 말하는데 도시에서 누릴 수 없는 재미이다. 러시아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주거 공간이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키빈존씨는 “자연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러시아의 민족성이고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러시아 대도시의 실버들은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대부분의 가족이 다차를 소유한 덕분이다.

물론 모든 러시아 노년층이 낭만적인 동기에서 전원생활을 선택하는 것만은 아니다. 직장을 그만두면 한달 연금이 대개 1500루블(약 6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골로바노프씨처럼 경제적 이유로 시내에 있는 아파트를 자식에게 주거나 세를 놓고 다차로 살러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텃밭을 가꾸는 것은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다.

소련 시절에는 연금만 가지고도 충분히 안락한 노후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실버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많고 선거 때만 되면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 시장경제 개혁을 통해 과거보다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된 자식들 대신 부모 세대가 희생한 셈이다.

현재 러시아의 실버들은 스스로를 “가혹한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2차대전을 겪으며 크고 나이들어서는 체제변혁에 휩쓸린 ‘운없는 세대’”라고 말한다.

키빈존씨는 “주변에는 은퇴한 뒤에도 유모나 청소부로 일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신중산층인 자식들 덕분에 그리 쪼들리지 않는 그도 “친구들과 어울려 오랜만에 어디로든지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

여행과 쇼핑 등 다양한 취미 생활을 누리는 서방의 실버와 비교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러시아의 실버들이다. 그나마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자작나무가 울창한 숲이 이어지는 거대한 유라시아의 자연 조건이 이들에겐 위안일 것이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