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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입력 | 2009-02-02 02:58:00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조선시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현지에서 받은 융숭한 대접이 어느 정도였는지 구체적으로 비용을 추산한 논문이 나왔다. 영국 옥스퍼드대 동양학연구소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지난달 31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주최로 열린 동양학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문명의 가격? 17∼19세기 조선의 일본사절의 역할과 비용’이다.

루이스 교수는 이날 서울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일본 사료에 기록이 있는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통신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 기간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1차례 보내졌고 1617년 간사이와 1811년 쓰시마 지역을 빼면 모두 에도(江戶·현 도쿄)로 보내졌다.

그는 1566∼1825년 일본의 공식적인 외국과의 관계를 담은 문서를 엮은 ‘통항일람(通航一覽)’을 인용해 1682년 에도로 가는 중간거점인 긴키(近畿) 지역에서 조선통신사 접대에 쓰인 비용이 쌀 318만7000여 석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1697년 일본의 쌀 총생산량(2580만 석)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 해 쌀 생산량의 12%에 이르는 양이다.

그는 또 이 수치가 지나치게 많다는 의견에 대해 “일본 전역에서 조선통신사 접대에 쓰인 총비용을 담은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1655년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 데 금 100만 냥(쌀 83만3000여 석)이 쓰였다는 언급도 있다”며 “이 기록만 놓고 봐도 17세기 최소한 3%의 국부(國富)가 조선통신사 접대에 사용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당시 막부정권은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경로에 있는 마을에 특별세금을 부과하고 노역에 수만 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가 온 1764년 20만 명 규모의 민란이 일어난 것도 특별세 추가 부담과 무관치 않다는 것.

루이스 교수는 “막부정권은 문명국인 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피지배층에 대한 권위를 강화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지속하길 원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접대비용이 ‘파괴적인 수준’이 되자 이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